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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나의 오늘과 연결되는“문화도시 익산”

역사 연구와 문화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예술과 적정 기술이 만나 삶의 활력을

상승시키는 문화도시 익산의 미래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해방 후 익산·이리의 변천사
  • Ⅲ. 해방 후 이리·익산의 변천사

    해방 직후
    전북정세이리도심

    1945년 8월 15일, 갑작스럽게 다가온 해방은 영광스러웠지만 지역은 갑자기 권력의 공백 상태로 들어갔다. 이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곧바로 철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의 일본인들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이리역에 몰려들었다.

    8월 16일 전주에서는 배은희 목사 등 우익인사들이 중심이 된 전주부임시시국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8월 17일에는 백용희가 주도한 조선건국전라북도임시위원회가, 8월 20일에는 최홍열을 위원장으로 한 좌우연합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전북지부가 조직되었다. 이리에서도 좌우익의 인사들이 모두 다양한 조직활동에 뛰어들었는데, 이리에서는 임종환을 위원장으로 건준지부가 결성되었다.

    1945년 9월,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이 한국에 들어오고, 그해 10월 무렵 이리지역 책임자로 스탄(Stan) 소령과 뒤이어 쇼로 대위가 부임했다. 그러나 9월 6일 서울에서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되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전북에서도 10월에 도와 각 시군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된다. 이 과정에서 익산은 인민위원회의 세력이 강성했던 곳으로 꼽혔다.

    한편 이리에서는 해방 후 건준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김병수가 9월에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이에 항의하여 12월에 이리-익산 독립촉성회 지부를 조직하며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군산 영명학원 출신으로 3.1 운동 당시 세브란스 의전에 다니며 군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던 인물로, 이후 이리에서 삼산의원을 개원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우파 인사였다.

    당시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극심하게 갈등했던 좌우대립은 이리-익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김병수를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협의회는 유엔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우익인사들로 구성되었다. 한편 이리읍과 달리 북부권을 중심으로 한 익산과 옥구 등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비교적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호남선과 전라-군산선이 교차하던 이리에는 해외에서 돌아오는 귀환동포들과 이리역을 통해 군산으로 나가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일본인들로 붐볐다. 사회주의가 강했던 이리-익산은 미군정기에 모든 영업, 교통 및 사업은 경찰서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정치조직의 공공집회에서 행해진 연설까지 기록하는 등 모든 집회와 시위를 엄격히 통제했다. 또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경대를 조직하였고, 현 익산역 광장 앞에 있었던 메이지(明治)여관을 근거지로 미군정 당국자와 이리시민들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 와중인 1947년 4월, 이리읍은 이리부(裡里府)로 승격이 되고, 1949년 이리는 이리시(裡里市)가 되어 익산군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 1945년 해방의 환희를 느끼는 시민들 사진 해방이후 전라북도 공보과 안내문 사진, 전주역사박물관 소장자료

    해방의 환희를 느끼는 시민들(1945년)(좌)

    전라북도 공보과 안내문(해방이후)(우)

    전주역사박물관 소장자료

    전라북도 공보과에서 발행한 것으로 학생들에게 우리의 적은 같은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라는 사실과 선생님들을 공경하며 학업에 열성을 다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1945년 해방 후 거리에서 사죄하는 일본인 사진 1950년 이리시내 전경 사진

    해방 후 거리에서 사죄하는 일본인(1945년)(좌)

    이리시내 전경(1950년)(우)

  • 해방 후
    이리·익산정치인들

    해방 정국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걸음씩 진전하고 있었다. 1948년 5월 10일 한국에서는 역사적인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비록 미군정의 법령과 UN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치루어졌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선거로 기록되었다.

    제헌국회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하고 당시 국가적 과제였던 농지개혁법, 반민특별법 등의 주요 법을 제정하면서 건국의 기틀을 다져왔다. 5·10선거에 극좌정당과 남북협상파 세력이 선거를 거부하고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외 대부분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폭넓게 선거에 참여했다. 미군정기 초 이리지역에서는 김병희, 김대희, 김병수, 이춘기, 김병기, 홍순무 등을 주축으로 한국민주당 세력이 강력한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들을 적대시하는 임표, 이서호, 이철우 등의 건국준비위원회 세력들도 이 지역에서 상당한 기반을 가졌다.

    선거 결과 이리부에서는 진보성향의 무소속 배헌, 익산군 갑을 지역에서는 대동청년단의 백형남과 좌익성향의 이문원이 각각 당선되었다. 미군정의 후원을 등에 업고 친일세력들이 주를 이루었던 한국민주당 소속 후보를 제치고 진보, 좌익세력이 우세를 점한 것이다.

    해방 후 이리·익산의 선거구 및 당선자와 소속정당 리스트
    대수 임기 선거구 및 당선자와 소속정당
    제1대 1948.5.31-1950. 5.30 이리부 배헌(무소속),
    익산갑 백형남(대동청년단), 익산을 이문원(무소속)
    제2대 1950.5.31.-1954.5.30 이리시 이춘기(무소속),
    익산갑 소선규(민주국민당), 익산을 윤택중(민주국민당)
    제3대 1954.5.31.-1958.5.30 이리시 김춘호(자유당),
    익산갑 소선규(민주국민당), 익산을 강세형(무소속)
    제4대 1958.5.31.-1960.7.28 이리시 김원중(자유당),
    익산갑 김형섭(자유당), 익산을 윤택중(민주당)
    제5대 1960.7.29.-1961.5.16 이리시 이춘기(민주당),
    익산갑 조규완(자유당), 익산을 윤택중(민주당)

    1952년 4월과 5월에 역사적인 지방의회 선거도 실시되었다. 익산의 초대 도의원은 임유희(무소속, 농업), 유해만(대한청년단, 도정업), 박지근(무소속, 농업), 김기섭(대한청년단, 농업)이 당선되었다. 지방의회는 1956년 제2회 도의원 선거를 끝으로 1991년 부활할 때까지 30년 동안 이뤄지지 못했다.

  • 1950년
    5·30 총선거에서
    1958년
    민의원 선거까지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무소속 의원이 다수 진출하여 국회가 불안정하였다. 선거결과 국회의원 210명 중 126명이 무소속이었다. 2대 국회가 구성된 지 한달도 못되어 한국전쟁이 일어나 국회가 대전, 대구, 부산 등지를 전전하게 되었고, 전쟁 중 사망·피살된 의원이 8명, 납북·행방불명된 의원이 27명이 되었다.

    이리-익산지역은 많은 후보자가 출마했지만 이리시에서는 무소속 이춘기, 익산군 갑구역과 을구역에서는 민주국민당의 소선규, 윤택중이 각각 당선되었다. 이들 세 의원의 정치노선은 대체로 우파 지향적이었으며 더욱이 한국전쟁이 겹치면서 이 지역의 지방정치는 보수우익 노선이 장악했다.

    1952년 제정된 발췌개헌에서는 국회를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으로 구성하기로 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참의원 선거는 미루고 1954년 5월 20일 민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집권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의 양당구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고 지방조직에 중앙당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이 결과 후보자 난립도 줄어들었고, 후보자들의 학력수준이 높아졌다.

    이리시에서는 시의원 출신인 자유당 시당부위원장이었던 김춘호가 당선되었다. 김춘호는 당조직과 지역사회의 기독교 청년조직을 활용해 당선되었고, 제3대 국회에서 전원(全院)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익산군 갑구역에서는 민주국민당의 소선규가 재선되었고, 익산군 을구에서는 무소속 강세형이 독일 ‘베를린 대학박사’의 바람을 일으키면서 당선되었다. 그는 훗날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시에 자유당으로 합류했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가 확립되어 치열하게 경합하였다. 이리시에서는 자유당의 김원중 공천후보가 전북수리조합장, 대한수리조합연합회장 등 농업분야의 전문경력과 당조직을 기반으로 이춘기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익산군 갑구역에서는 자유당의 김형섭이 민주국민당의 소선규를 물리치고 원내에 들어갔다. 익산군 을구역에서는 윤택중이 재선되었다.

    제2대 민의원 선거 이리시 입후보자 선거공보물(1950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자료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 이리시 입후보자 선거공보물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자료
  • 1952년 선거독본_選擧讀本 사진, 전주역사박물관 소장자료 1950년 제2대 총선 이리시 득표 집계표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자료

    선거독본_選擧讀本(1952년)(좌)

    전주역사박물관 소장자료

    전라북도 지방과에서 발행한 지방의회 의원 선거독본이다. 민주주의와 국민정치, 지방자치와 지방의회, 지방의회 의원선거, 지방의회 의원선거와 우리의 각오 총 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부록이 첨부되었다.

    제2대 총선 이리시 득표 집계표(1950년)(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자료

    1958년 민주당 이리시당부 사진 1958년 자유당 이리시당부 사진

    민주당 이리시당부(1958년)(좌)

    자유당 이리시당부(1958년)(우)

  • 한국전쟁과 이리,
    이리역 오폭사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리·익산 지역은 한국전쟁의 초기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전선이 이동하면서 큰 피해 없이 한국전쟁기를 맞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비극은 정말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1950년 7월 11일 아무런 이유없이 미군에 의해 이리역이 폭격을 당하며 수백 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오랜 세월 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2010년 6월 29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통해 사건 발생 60년 만에 미군 전투기의 오폭으로 인한 피해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민간 차원의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2003년 ‘1950년 미군 이리폭격 희생자 추모제’에서 발표된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그 순간 익산역 일대를 선회하던 폭격기는 시커먼 무엇인가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직원들과 민간인들은 낙하산이 떨어진다고 신기해하며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었다. (중략) 곧 이어 굉음과 함께 엄청난 화염이 이리역 일대를 삼켜버렸다. 미군폭격기가 이리역 일대에 사재하여 작업 중이던 기관차는 물론 구내시설에 대해서도 가공할 폭격을 가하였다.
    (중략) … 미군폭격기에 의한 양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4일 후 익산역 일대의 상공에는 일명 ‘호주기’라 불리는 미공군소속의 전투기 4대가 나타났다. 전투기들은 기수를 아래로 돌려 저공비행을 하면서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있던 사람들과 무고한 양민들을 향해 로켓포를 쏘고 기총소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또 다시 몇 십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 2003년 <제4회 1950년 미군 이리폭격 희생자 추모제 자료집>에서 발췌한 글을 재인용

    이 사건과 관련해 고의성 여부를 두고 진실 규명을 해왔고, 2001년 익산시의회는 이리역 오폭사건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사건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리역의 비극은 이로부터 27년 후 이리역 폭발사고의 비극으로 다시 재현된다.

  •  
    한국전쟁 당시의 이리 항공사진

    한국전쟁 당시의 이리 항공사진

    이 사진은 2000년 미해군 해군역사박물관에서 발간한 『바다로부터의 공격-인천상륙작전』에 수록된 사진이다. 이 사진이 이리역 오폭사건 당시의 사진인지에 대한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리역과 도시공간, 이리농림으로 추정되는 학교 등 1950년대 이리 시가지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

     
    1950년 미군의 이리폭격 희생자 위령비 사진

    1950년 미군의 이리폭격 희생자 위령비(현재_익산역 광장)

  •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급서

    ‘비 내리는 호남선’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는 역대 가장 뜨거운 선거 중 하나였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자유당을 앞세워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고, 여기에 맞서 민주당은 신익희(申翼熙, 1894-1956)가 후보로 나섰다. 한국 선거사상 최고의 선거 슬로건으로 꼽히는‘못살겠다 갈아보자’가 이때 등장했다. 신익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중적 명망이 높았으며 명연설가로 이름을 떨쳤다. 신익희는 5월 2일 한강 백사장에서 30만 인파를 앞에 두고 한국 정치사상 최고의 선거유세를 한 다음 이틀 후 호남지역으로 유세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5월 5일 새벽 전북 이리로 향하던 호남선 열차 안에서 강경 부근을 지나던 중 뇌일혈로 졸도하고, 45분 후 이리역에 도착하여 호남의원으로 달렸지만 끝내 숨졌다. 이때신익희를 업고 이리 호남의원으로 뛰었던 인물이 전설적인 주먹 시라소니였다고 전한다.

    신익희 급서의 불똥은 난데없이 가요계로 튀었다. 때마침 유행했던 ‘비 내리는 호남선’은 졸지에 전라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 노래가 신익희의 미망인이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이 노래의 가사를 지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을 뒤덮자, 이승만 정권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묶어 버렸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는 신익희 급서 1년 전에 지어진 노래였다. 어쨌거나 그때도 지금도 ‘비 내리는 호남선’은 이리·익산과 뗄 수 없는 노래로 남아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내리는 호남선에/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속을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내리는 호남선에/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 박춘석 작곡 ‘비 내리는 호남선’
    「비 내리는 호남선」앨범 커버 사진

    「비 내리는 호남선」
    앨범 커버

    열차 안에 안치된 신익희 유해 사진

    열차 안에 안치된
    신익희 유해(1956년 5월 5일)

    1958년 이리역 전경 사진

    이리역 전경(1958년)

  •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경향신문 나훈 기자는 이 사고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화약적재 화물열차가 한국화약호송원 신무일의 부주의로 폭발. 역구내 4번선에 깊이 15미터, 폭 40미터의 큰 웅덩이가 생기고 열차와 철로가 박살났다. 이 사고로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 이재민 9,973명, 1,982세대, 건물 9,530동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돌풍에 의해 반경 8km까지도 유리가 깨졌다. 한국 철도사상 최대의 참사로 기록됐다.’ - 당시 경향신문 기자 나훈

    1977년 11월 11일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이날 저녁은 월드컵 최종예선전 한국 대 이란의 경기가 9시부터 열렸고, 같은 시간에 이리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 쇼’가 열리고 있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축구중계와 하춘화쇼가 진행되는 가운데 일어났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원인은 명확했고 그 이후 수습과정은 신속했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전대미문의 화약폭발사고를 빠르게 수습하고자 했다. 피해를 입은 이리시에는 오랜 숙원이었던 도시개발을, 피해자와 시민들에게는 경제적 보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리역 폭발사고는 사고 발생 후 42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확한 사망자의 수와 명단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 이리역 폭발사고의 최대 피해지역인 철인동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리역폭발사고 이후 정부는 이리시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이리건설’을 위한 집중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실제로 이리시의 중심시가지는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당시 적선가로 불렸던 창인동은 새로운 상업주거 지역으로 변모했고 마살매에는 모현아파트가 들어섰으며 지금은 고급 아파트단지로 바뀌었다. 당시 시민들의 염원이었던 이리역 앞의 남북로가 원광대까지 시원하게 뚫렸고 이리역 신축, 제2산업단지 건설 등도 약속되었다.

    42년이 지난 지금 이리역 폭발사고는 익산시민들의 아픈 역사를 넘어 도시의 발전사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정리될 필요가 있다.

  • 1975년 폭발사고로 폐허가 되기 전 철인동 전경 사진

    폭발사고로 폐허가
    되기 전 철인동 전경(1975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77년 폭발사고로 사망한 희생자의 시신을 확인하는 유족들 사진

    폭발사고로 사망한
    희생자의 시신을 확인하는 유족들(1977년)

    경향신문

    현 문화예술의 거리_1977년 폭발사고 전 중앙동 사진

    폭발사고 전 중앙동(현 문화예술의 거리_1977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77년 폭팔사고 후 소라산 천막촌 생활 사진

    폭발사고 후 소라산 천막촌 생활(1977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77년 폭발사고 후 이리역 구내 열차선로 사진

    폭발사고 후 이리역 구내 열차선로(1977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78년 새롭게 단장한 이리역 사진

    새롭게 단장한 이리역(1978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 이리를 빛낸
    추억의 공장들과
    향토기업들

    해방 이후 이리는 농업의 중심지이자 교통거점, 교육도시이자 소비도시로 변화해갔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교차하면서 호남의 물류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갔고, 아침저녁으로 이리역을 거쳐 이동하는 통학생들로 역전은 북적거렸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리에도 산업화의 바람이 불었다. 당시 이리를 대표하는 기업들은 국제전광사·은성고무·쌍영섬유(쌍방울)·삼양식품·보배소주 등이 있었다.

    1962년 설립된 국제전광사는 이리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경기도 부천과 이리에 공장을 두고 있었다. 마동에서 공장을 시작하여 1970년대 송학동으로 옮겨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벽시계가 전광사 제품이었다. 당시에는 새롭게 개업하거나 이사를 할 때 빠질 수 없는 최고의 선물이 전광사가 만든 커다란 장식용 괘종시계였다.

    1971년에는 삼양식품 이리공장이 세워졌다. 강원도 철원 출신인 전윤중 삼양식품 회장은 한국전쟁 당시 이리지역으로 피난왔을 때, 끼니를 거르던 그를 따뜻하게 보살펴준 이리를 잊지 않고 1970년 이곳에 공장을 세웠다. 삼양식품 이리공장은 한때 5백여 명의 종업원이 근무했으며 하루 20-30만개의 라면을 생산해왔다.

    보배소주는 이리에서 성장한 향토기업이다. 1969년 마동으로 이전하면서 공격적인 시장확대에 나선 보배소주는 1970년대 전국으로 판매망을 넓히면서 1979년 군산의 백화소주까지 합병하는 등 198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 초 전북시장 점유율 85%를 기록할 정도로 전통적인 자도주로서 성장했으나 건설과 개발사업에 뛰어들면서 적자를 거듭하다 1994년 결국 도산하고 말았다.

    쌍방울의 창업자 이봉녕은 어린 시절 돈이 없어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니고 전국을 돌며 갖은 고생을 했다. 해방 이후 이리에 정착한 그는 노점에서 양말을 팔며 돈을 모아 1954년 이리파출소 앞에 형제섬유를 개업했다. 이후 1962년 인화동에 삼남메리야스공업사를 설립하고 메리야스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1964년 쌍방울이라는 새로운 상표를 출시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쌍방울은 국내 최고의 메리야스 업체로 자리 잡았고, 프로야구단 쌍방울 레이더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무주리조트 등 관광레저산업으로 진출하는 등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자금난을 겪으며 2004년 대한전선 계열사로 편입되고 말았다.

  • 1971년 삼양식품 이리공장 준공식 현장 사진

    삼양식품 이리공장 준공식 현장(1971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76년 시계부속을 조립하는 국제전광사 직원들 사진

    시계부속을 조립하는 국제전광사 직원들(1976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76년 보배소주 공장 사진

    보배소주 공장(1976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81년 쌍방울 섬유공장 사진

    쌍방울 섬유공장(1981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 이리의 산업단지와
    노동운동

    이리공업단지는 이리시민들의 오랜 염원이었다. 1969년 이리상공회의소는 이리시 등과 함께 이리공업단지 개발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하지만 개발은 늦어졌다. 그후 1970년 3월, ‘이리공업단지 조성실시 계획’을 건설부로부터 허가받게 되었고, 1973년 11월부터 공단조성을 시작했다.

    이리에 공업단지가 들어선 것은 1974년이었다. 이리수출자유지역은 1973년 이리시를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아이디어였으나 해외기업은 거의 오지 않았고 결국 국내기업의 입주를 허가하면서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1976년에는 이리 귀금속보석단지가 조성되어 1990년 초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세계 최고의 큐빅생산지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수입자유화 이후 급속하게 무너졌으나, 최근 유턴기업들과 함께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익산의 공업단지 리스트
    1974년 12월 31일 제1국가산업단지 완공
    1975년 2월 5일 이리수출자유지역 관리소 개소
    1975년 8월 29일 귀금속 제1단지 집단화
    1984~1996년 제2일반산업단지 조성
    2000년 9월 9일 익산자유무역지역관리원으로 명칭 변경
    (자유무역지역, 귀금속단지, 국가산업단지로 분류)
    2007~2013년 제3일반산업단지 조성
    2010년 12월 15일 익산자유무역지역 지정해제
    2012년 7월 국가식품클러스터 종합계획 수립·발표(농식품부)
    2016년 12월 국가식품클러스터 산업단지 제1공구 준공

    1978년 수출자유지역에 독일 기업인 후레아패션이 들어왔다. 후레아패션은 수출자유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였다. 사무직을 제외한 생산직 노동자만 약 1,800여 명에 달하는 의류공장이었다. 후레아패션의 민주노조건설 투쟁은 1987년 4월 임금인상 투쟁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 투쟁과정에서 회사 측은 기습적으로 휴업공고를 낸 뒤 12명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16.5%의 임금인상, 최저생계비 보장, 부당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회사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의 투쟁은 그해 9월 민주노조가 구성되고 10월 비밀리에 한국을 방문한 뮬러 회장과의 담판을 통해 마침내 복직을 쟁취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 1973년 이리수출자유지역 기공식 현장 사진

    이리수출자유지역 기공식 현장(1973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81년 쌍방울 섬유공장 사진

    쌍방울 섬유공장(1981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76년 보석가공 중인 근로자들 사진

    보석가공 중인 근로자들(1976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1987년 후레아패션 정문을 봉쇄한 전경들을 밀어내고 정문에서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1987년 4월 8일) 사진

    후레아패션 정문을 봉쇄한
    전경들을 밀어내고 정문에서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1987년 4월 8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장자료

  • 1980년대
    익산역 광장
    뒤흔든 민주화운동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의 시대였다. 이리도 원광대 중심의 학생운동과 산업단지의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첫 신호탄은 역시 원광대 학생운동의 태동이었다.

    1980년 5월 이리에서도 민주화의 열기는 뜨겁게 타올랐다. 그해 4월 28일 원광대생들의 직접 투표로 구성한 총학생회가 그 중심에 섰다. 5월 7일 총학생회가 주최한 민주화촉진대회에서 원광대생들은 ‘언론자유와 학원자주화’ 등 8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교내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원광대생 3천여 명은 교문을 나와 경찰들의 저지선을 뚫고 3km 떨어진 이리역 광장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5월 17일 전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지면서 광주민주화항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전북 순창 출신으로 원광대학교 한의과 대학에 재학 중이던 임균수 열사가 1980년 5월 21일 광주에서 계엄군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원광대는 임균수 열사를 기념하여 캠퍼스에 추모비를 세워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념하고 있다.

    1980년 6월 25일에는 여산성당의 주임신부였던 박창신 신부가 여산성당 내의 모든 공소를 돌며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강론을 펼치다가 사제관에서 쇠파이프를 든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85년 9월은 학원안정법 투쟁이 벌어졌다. 9월 24일 원광대 학생 5백여 명은 총학생회 정기총회를 연 후 교내를 돌며 ‘학원안정법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987년 6월 10일 원광대에서 시작된 ‘호헌철폐, 독재타도’ 투쟁은 200명에서 3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이리역 광장까지 진출했다. 이리역 광장에서 합류한 시민들까지 1만여 명이 밤늦도록 시위를 벌였다. 원광대 학생들과 이리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는 결국 정부의 직선제 개헌을 받아내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걸음 성장시켰다.

    1980년 5월 원광대 학생 3,000명의 시국토론회 사진

    원광대 학생 3,000명의 시국토론회(1980년 5월)

    전북일보

    1987년 5월 전경과 대치한 원광대 학생들 사진

    전경과 대치한 원광대 학생들(1987년 5월)

    원광대학교 기록물관리실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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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노태우 총재가 이리역을 방문하자 전북지역 대학생들의 반대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는 전경 사진

    노태우 총재가 이리역을 방문하자 전북지역
    대학생들의 반대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는 전경(1987년)

    동아일보

     
    1987년 원광대 학생들의 연좌시위 모습

    원광대 학생들의 연좌시위 모습(1987년)

    원광대학교 기록물관리실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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