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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나의 오늘과 연결되는“문화도시 익산”

역사 연구와 문화 교육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예술과 적정 기술이 만나 삶의 활력을

상승시키는 문화도시 익산의 미래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익산의역사 
개혁과 도전, 개방과 포용의 다양성 도시 익산

익산은 지리적으로 남쪽으로는 만경강이 흐르고, 서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른다. 미륵산과 용화산을 제외하면 익산 땅의 90%는 평야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은 익산을 경제적으로는 물산이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인 도시로 발전시켰다. 한성(서울)에서 밀려난 백제는 권토중래를 꿈꾸며 익산을 왕도로 삼아 재기를 노렸고, 근대 이전까지 여산과 금마는 육상교통의 요지로 새로운 문물과 사상이 머무르는 거점이었다.

근대 이전 금강의 지리적 영향을 받으며 경제와 문화, 사상과 문물의 유통거점이 되었던 금마 중심의 익산은 1914년 호남선의 개통과 이리역이 개설되면서 점차 이리(裡里)를 중심으로 한 근대도시로 변화해갔다. 1995년 익산군과 통합되기 전까지 이리시는 호남선과 전라선이 교차하는 철도교통의 중심지로써 교육, 물류, 패션, 종교, 산업의 중심도시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지리적·인문적 여건 속에서 익산은 개혁과 도전, 개방과 포용의 도시로 성장해 나갔다.

금강 연안에 위치한 입점리 고분군의 금동신발과 전통적인 한국의 목탑 양식으로 건립된 한국 최고(最古)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 김대건 신부의 기착지와 그를 기념한 나바위 성당,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슬로건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소태산 박중빈, 농업기술의 새로운 변화를 위하여 설립되었던 이리농림학교, 이리역 폭발사건과 새이리 건설 등은 익산이 지나온 천년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 역사적 유산과 사건들은 매 시기마다 익산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시련과 도전의 역사를 맞았으며, 어떤 방식으로 이를 개혁과 포용, 다양성과 혁신이라는 시대정신으로 전환시켜왔는가를 잘 보여준다.

마한

『삼국유사』와 『고려사』에서 “『위서』에는 조선왕 (기)준이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하였다”, “금마군(金馬郡)은 본래 마한국이다”고 전한다. 익산에는 영등동, 송학동 등지에서 마한 관련 중요 유적과 유물이 다수 조사되어 기록에 보인대로 마한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 기준의 남래지 – 조선왕 기준이 궁인들을 이끌고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마한이라 함.

- 마한의 중심지 익산 - 영등동, 송학동 등 마한관련 중요유적과 유물 확인

백제

백제 무왕(600~641년)은 익산 천도 후, 백제왕궁과 미륵사와 제석사 등을 건설하며, 보다 새롭고 강력한 백제를 만들기 위해 힘을 쏟았다. 익산 쌍릉(대왕릉)에서 출토된 인골의 분석결과, 백제 서른번째 임금 무왕인 것으로 밝혀졌다.

- 백제 서른번째 임금 무왕(600~641)의 천도지(백제왕궁, 미륵사, 제석사, 쌍릉, 익산토성)

- 639년 미륵사지 서쪽 석탑에 금제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등 사리장엄을 봉안함.

- 익산쌍릉(대왕릉) 발굴조사에서 나온 인골의 주인이 백제 무왕인 것으로 확인됨.

통일신라

『삼국사기』에는 661년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의 땅에 피가 흘러서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신라 태종무열)왕이 죽었다’, 670년 “6월,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을 금마저에 살게 하였다.”, 674년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에도 고구려 왕족 안승을 금마에 살게 하고, 보덕왕을 삼을 정도로 익산(금마저)을 견제의 대상으로 보았다. 익산토성은 보덕성으로도 불렸다.

- 661년 대관사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되고, 금마군의 땅에 피가 흘러서 다섯보가 됨.

- 고구려의 왕족 안승을 금마저에 살게 하고 보덕국의 왕으로 임명함.(익산토성을 보덕성이라고도 부름)

고려

1344년 익주(益州)로 승격되었다. 원나라 황후였던 기황후의 외향이기 때문이다. 기황후의 외조부는 본관이 익산인 이행검이며, 고려 후기의 문신 이공수(1308~1366)가 그의 외종사촌이다. 이공수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로,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공민왕 때에 좌정승을 지냈으며, 익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 중기 1582년에 그를 배향하기 위해 세워졌던 화암서원터가 미륵사지 북편에 있다.

- 1344년에 익주(益州)로 승격됨,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의 외향이었기 때문임.

- 기황후의 외조부는 고려 후기의 문신 이행검이며, 문신 이공수는 그의 외종사촌임.

- 이공수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공민왕때 익산부원군에 봉해졌고, 조선 중기에는 미륵사지 북편의 화암서원에 배향됨.

조선

조선 초기, 1407년(조선 태종 7년) “익주(益州)의 미륵사를 자복사(資福寺)로 삼았다”고 하였다. 자복사는 조선시대에 나라의 복을 빌기 위해 정책적으로 지정하였던 명찰로써, 미륵사가 국가의 중요사찰이었음을 말해준다. 조선 중기, 대제학을 지냈던 관리이자 시문(詩文)에 유명한 양곡 소세양(1486~1562)의 고향이다. 그는 시문은 중국 명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뛰어났고, 문명이 높았다. 그의 사후에도 잘 알려서 화암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문집으로는 『양곡집』이 있다.

- 1407년 익주(益州)의 미륵사가 국가의 복을 기원했던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됨.

- 화암서원에 배향된 양곡 소세양은 1509년 문과에 급제한 후 대제학 등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에 까지 알려졌음. 은퇴 후 익산으로 낙향하여 20여년을 지역 교화에 힘씀. 문집으로는 『양곡집』이 있음.

- 1845년 김대건 신부, 망성면 화산에 첫발을 딛음. 이를 기념하여 1906년에 나바위성당을 세움.

근현대

지금의 익산시는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된 도시다. 이리(裡里)는 솜리라는 이름으로 남일면에 속해있던 작은 마을로 1912년 호남선 개통과 함께 이리역이 개설되면서 근대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이리시-익산군은 해방후 도시-농촌의 형태로 지내오다 1995년 5월 익산군 1읍 14면이 이리시와 통합, 도농복합형(都農複合型)의 새로운 익산시로 개편되었다.

- 1912년 호남선 개통과 이리역 개설, 이리-강경선, 이리-군산선 운행

- 1919년 4.4 만세운동과 문용기 열사의 순국

- 1920년 익옥수리조합 설립

- 1922년 이리농림학교 설립하여 농업기술의 선진화를 기함.

- 1924년 원불교 익산 총부 건설

- 1925년~1937년 대간선수로 건설과 만경강 직강공사 시행

-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후, ‘새이리 건설’ 사업을 계기로 삼아 성장 발전

- 1995년 익산군-이리시 행정구역 통합, 익산시로 개칭

- 2004년 「고도보존특별법」에 의해 4대 고도(古都)로 지정

- 2015년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가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세계유산에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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