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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多이로운 문화도시 익산

이리·익산의 문화와 사람들
  • Ⅵ. 이리·익산의 문화와 사람들

    민족종교
    원불교출발
    소태산-
    안창호만남

    익산에는 한국의 4대 종교로 꼽히는 원불교의 중앙총부가 있다. 원불교는 지난 2016년 원불교 100주년을 맞았다. 1916년은 원불교를 개교한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이 깨달음을 얻은 해로 원불교는 그해를 원기 원년으로 삼고 있다.

    1923년 6월에 서중안, 서동풍 형제가 와서 대종사의 하산(下山)을 지성으로 간청하였다. 대종사는 “익산군 이리 부근은 평야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무산대중의 생활터전이 될 수 있고 또한 교통이 편리하여 교화의 기지로 적당하다.”고 하며 익산을 총부기지로 선정했다. 1924년 6월 1일 이리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가 열렸고, 이리역에서 4km 떨어진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에 총부건설 기지로 정했다. 바로 그 자리가 지금의 원불교 총부자리다.

    소태산 박중빈 사진

    소태산 박중빈
    (朴重彬, 1891~1943, 1929년 촬영)

    원불교 기록물관리실 소장자료

    원불교가 이리에 자리 잡은 그 시절은 엄혹한 일제 강점기였다. 원기 20년인 1935년 여름, 도산 안창호가 전국 각지를 순회 중 독립운동가 배헌의 인도로 총부를 방문했다. 박중빈이 청하원에서 그를 만나 위로하니, 안창호가 “나의 일은 판국이 좁아 민족에게 큰 이익은 주지 못하고, 나로 인하여 압박받는 동지까지 적지 아니하나, 선생께서는 일의 판국이 넓고 방편이 능란하시어,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면서도,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니 역량이 참으로 장하옵니다.”고 하였다.

    안창호가 총부를 방문하여 박중빈을 만나고 돌아 간 뒤 원불교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더욱 극렬해졌다. 심지어 1936년 가을 일제는 북일주재소를 총부 청하원에 설치하고 형사를 파견하여 총부 대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도산 안창호 사진

    도산 안창호
    (安昌浩, 1878~1938)

    1943년 원불교 본부 대각전 사진

    원불교 본부 대각전(1943년)

    원불교 기록물관리실 소장자료

  • 나바위 성당
    ‘ㄱ자 교회’
    두동교회

    나바위 성지는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신부가 1845년 10월 12일 밤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었던 고주교, 다블뤼 안신부, 그리고 11명의 조선교우들과 첫발을 내딛은 곳이다. 화산 정상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세웠다. 목선의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되었다.

    나바위 성당은 이를 기념하여 1907년에 지었다. 당시에는 목조건축으로 앞면 5칸, 옆면 13칸이었는데 1916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일부분을 벽돌로 바꿨고 그 뒤 다시 두차례 수리를 하였다. 2층 건물과 비슷하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천장은 판자로 처리했고 바닥에 널빤지를 깔았다. 한국전통양식과 서양양식이 합쳐졌다고 한다.

    익산시 성당면의 두동교회는 1923년 교인 이종규가 채마밭 100여 평을 내놓고 안면도의 소나무를 헐값에 사서 지은 기역자로 된 24평 예배당이다. 기역자 예배당은 남자석과 여자석을 분리하여 남녀가 서로 쳐다볼 수 없게끔 만들어졌다. 남녀유별의 전통과 서양종교의 결합이 바로 이러한 형태의 건물을 만든 것이다.

    두동교회 구본당은 2002년 4월 6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교회 건물은 전국적으로 만들어졌으나 1930년대를 전후해서 사회적 인식 변화로 내부의 휘장이 제거되고 더 이상 “ㄱ”자형 건물이 건립되지 않았으며, 해방 이후에는 남녀가 한 공간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두동교회 사진

    두동교회(현재)

    1958년 나바위성당 사진

    나바위성당(1958년)

  • 익산이 나은
    국창 정정렬
    초상화
    대가 채용신

    근대 판소리 명창으로 꼽히는 국창 정정렬(丁貞烈, 1876-1938)은 망성면 내촌리 출생이다. 7세때 이미 소리꾼의 기질이 넘쳐 부모가 그를 조선 후기 8명창으로 꼽혔던 당대의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문하로 보냈다. 정정렬이 14살 되던 해 스승 정창업이 세상을 떠나자 그 후로 이날치를 찾아가 사사했다.

    2년 후 이날치 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후 독공에 들어가 익산의 심곡사와 부여 무량사 등에서 수년간 소리공부에 매진하여 국창의 반열에 올랐다. 정정렬은 소리꾼으로서 타고난 목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성음을 다양한 음악적 변용을 통해 신식 판소리로 전환시키는 창의적 기예를 보여줬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제를 만들었고, 일제강점기 청중들의 정서와 부합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많은 판소리 공연자들이 그의 소리를 배우고자 하여 당시 활동했던 명창들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교육 활동을 하기도 했다.

    석지 채용신(蔡龍臣, 1848-1941)은 조선 후기의 작가로 한국을 대표하는 초상화가이다. 그의 고향은 익산이며 지금 그의 묘지는 왕궁면 장암리에 있다. 산수, 인물, 영모 모두 잘 그렸지만,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하여 이하응(흥선대원군), 최익현, 전우, 황현 등의 초상을 그렸다. 극세필을 사용하여 얼굴의 세세한 주름살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원근과 명암이 뛰어났다. 1901년 경북 칠곡군수, 충남 정산군수 등을 지냈고 1906년 전라도로 낙향한 후 1941년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채용신 사진

    채용신(蔡龍臣, 1850~1941)

    정정렬 사진

    정정렬(丁貞烈, 1876~1938)

  • 가람 이병기
    익산의 문학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선생은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이다. 호를 가람 혹은 ‘수우재(守愚齋)’로 쓰는 선생의 생가는 여산의 조촐한 선비 가옥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이 생전에 지었던 ‘별’이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선생은 일제 침략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끌려가 1년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뒤 우리말 연구에 노력하면서 전북대에서 강의하기도 하였다. 2017년 생가 곁에 가람문학관이 들어섰다.

    소설 『탁류』의 소설가 채만식(蔡萬植, 1902-1950) 선생은 익산 주현동과 모현동에 거주했었다. 그의 소설 『탁류』에서는 초봉이가 이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유성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원광대 국문과는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원광문학사단’이라 일컬어진다. 소설가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등이 젊은 시절 원광대와 이리를 누비며 문학가의 꿈을 키웠다.

    시인 이광웅은 한때 원광여고 교사로 있었고 훗날 오송회 간첩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치렀지만 빛나는 시편을 남겼다. 시인 안도현은 원광대에 입학하면서부터 이리중학교에 근무하기까지 15년 동안 익산에서 한국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성장했다. 노래와 더불어 아름다운 노랫말로 유명한 「아침 이슬」의 가수 김민기도 이곳 중앙동이 고향이다.

     
    여산면에 남아있는 이병기 생가 사진

    여산면에 남아있는 이병기 생가(현재)

    가람 이병기 사진

    가람 이병기(李秉岐, 1891~1968)

  • 이리·익산체육,
    이리농림에서
    양영자까지

    이리의 근대스포츠는 이리농림과 함께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 이리농림은 축구, 야구, 정구 뿐만 아니라 육상, 럭비, 씨름(각희) 등 거의 전 체육 종목에 걸쳐 기록을 남겼다. 각희는 1927년에 이리에서 시작되어 1932년에 고창에서 경기가 개최되었고 1934년 조선신궁대회에 이리농림이 출전하여 우승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935년 이리농림 축구부는 그해 8월 호남축구대회에서 우승한 후 9월 열린 제7회 전조선 중등학교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이리농림의 첫 전국대회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이리체육관을 설립한 조석인은 이리의 복싱역사를 만들었다. 남성고 2학년때 친구 따라 체육관에 갔다가 처음 글러브를 낀 그는 이리 복싱의 대부가 되었다. 전북대를 졸업한 뒤 스물 넷의 나이였던 1960년 9월 이리체육관의 문을 열었고, 그로부터 46년간 30여명의 국가대표를 길러냈다. 유종만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뮌헨올림픽에서 8강까지 올라갔다. 조석인으로부터 ‘너는 선수되기 틀렸다’ 는 질타를 받을 정도로 무뎠던 신준섭은 맞고 또 맞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일어나 결국 원광대 재학중이던 1984년 LA올림픽 복싱 미들급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익산의 체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탁구여제 양영자다. 국민학교 3학년 처음 탁구를 시작한 그는 이일여중 2학년 때 청소년대표가 되었고 1981년에는 이일여고생으로 국가대표 마크를 달았다. 그러나 선수로서 꽃을 피우던 그 시절 1983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이나 테니스앨보로 고통받으며 진통제로 아픔을 달랬다. 그 테니스 엘보를 신앙으로 극복하면서 양영자는 한국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사랑받는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

    86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단체전 우승을 이끈 그는 이후 간염으로 50일간이나 병원에 누워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긴 투병생활을 끝내자마자 그는 1987년 뉴델리세계대회에 출전 4관왕에 오르면서 병마를 떨쳐냈다. 결국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현정화와 짝을 이룬 그는 마침내 필생의 숙원이었던 금메달을 조국에 안겼다.

     
    스매싱하는 양영자 사진

    스매싱하는 양영자

  • 이리·익산노래,
    ‘고향역’과
    ‘갈대의 순정’

    이리역은 늘 사연이 흘러 넘치는 곳이었다. 전라선과 호남선은 가난을 넘어 희망을 위해 떠나는 이들로 가득했다. 반백년을 넘어 사랑받는 나훈아의 히트곡 ‘고향역’은 1971년 익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임종수가 작사·작곡했다. 임종수는 삼기면 지서에서 경찰관을 하던 형과 함께 살았는데, 남성중과 남성고를 다니던 시절 매일 삼기면에서 익산으로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그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도 거른 채 먼 거리를 걸어 황등역-익산역 구간 열차를 타고 학교를 다녔고, 그때의 추억을 담아 이 노래를 작곡했다. 당시 먼 거리를 걸으며 철길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보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떠올라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고향역’ 으로 되살아 났다는 것이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이뿐이 곱뿐이/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설레는 가슴 안고/눈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박일남이 부른 ‘갈대의 순정’(1967년)을 작곡한 오민우도 이리에서 동중과 이리공고를 나왔다. 본래 이북 출신이던 그의 가족들은 1945년 월남하여 김제에서 살며 이리의 학교를 통학하면서 목천포 근처의 만경강 갈대밭길에 연유한 노랫말을 썼다. 홍익대 법대 1학년에 다니던 중 6인조 그룹사운드를 결성, 피아니스트로 김포 미8군 비행기부대 내 ‘미군사병구락부’에서 재즈와 팝을 연주했다. 이후 고향친구 신해성과 함께 전국여행을 하던 중 무작정 낭랑악극단을 찾아가 악극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사랑엔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울지를 말아라/아~ 아~ 갈대의 순정

    이러한 대중가요 뿐만 아니라 익산의 노래와 놀이는 늘 서민들의 삶과 함께 했다. 금마의 기세배놀이는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놀이였고, 익산목발노래는 이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불리는 노동요다. 지게를 진 나무꾼들이 작대기로 지게의 다리인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던 노래라고 해서 목발노래로 불렸다.

     
    황등역 전경 사진

    황등역 전경(시기미상)

    조성현 제공

    가수 박일남의 데뷔곡인 「갈대의 순정」 앨범커버 사진

    가수 박일남의 데뷔곡인
    「갈대의 순정」 앨범커버

  • 이리시
    전북도청
    올 뻔한 사건

    한국 최초의 지방의회 선거가 실시된 것은 1952년 5월 10일이었다. 그 한해 전인 1951년에 전주의 전라북도 경찰국 무기고가 화재로 폭발하면서 유서깊은 전북도청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당연히 도청을 새로 건축하게 되었는데 이때 도청을 전주에서 교통의 요지 이리로 이전하여 신축하는 방안이 제기되었고 이것이 뜻밖의 호응을 얻은 것이다.

    당시 이리-익산지역에서 도청을 이리로 이전하려는 운동이 갑자기 전개되면서 전주시민들은 크게 당황했다. 당시 이리시는 도내에서도 교통의 요충지이며 교육과 산업의 도시로 도내에서 전주, 군산에 이은 제3의 도시였다. 이 와중에 이리시와 익산군 출신 도의원들이 느닷없이 도의회에 ‘전북도청의 이리 이전안’을 제출한 것이다. 또 이에 앞서 11월 9일 전주시의회에서는 ‘도 청사의 진북동 이전 안’을 긴급안건으로 결의한 바도 있었다.

    문제는 이렇듯 심각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도의회에서는 1952년 11월 29일 ‘도청 이리 이전안’을 정식으로 상정하고 표결에 부쳤다. 이날 41명이 참석하여 표결한 결과 공교롭게도 찬반이 각각 19표로 동수가 되었고, 이에 사회를 맡았던 이주상(전주) 부의장이 찬반 동수인 경우에는 의장도 투표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결국 반대표를 던져 도청의 이리 이전안은 1표 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그때 ‘도청의 이리 이전안’에 찬성한 의원은 이리, 익산은 말할 것 없고, 군산 옥구, 김제 출신의 의원들이었다. 어떻든 이리 이전안은 불과 1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부결되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후 다시는 이 문제는 나오지 않았다.

    반면, 1961년 이리에 자리잡은 이리기독교방송은 1980년대까지 성장일로를 거듭했으나 1992년 전주 스튜디오를 건립하면서 이리기독교방송에서 기독교전북방송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6년 전주로 완전 이전했다.

     
    일제강점기 신축한 전라북도청사 사진

    일제강점기 신축한 전라북도청사(1921년)

    전주역사박물관 소장자료

    도청사는 일제강점 직후 선화당을 비롯한 감영건물을 활용하다가 1911년 재무감독국 청사로 이전하였으며, 1921년 전라감영 자리에 도청사를 신축하면서 옮겨왔다.

    해방 후 신축한 전라북도청사 사진

    해방 후 신축한 전라북도청사(1952년)

    전주역사박물관 소장자료

    1951년 한국전쟁 중 무기고 폭발로 선화당과 도청 본관이 전소되어 도청사를 1952년 신축하였다.

  • 전북대학교의
    모체가 된
    이리농림학교

    이리는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근대농업의 심장과도 같은 지역이었다. 1948년 4월 정부는 이리농림학교를 이리농과대학으로 개편했다. 이후 1951년 국립 전북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이리농과대학은 전북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이때 도립 이리농과대학은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되었고 농학과, 임학과, 수의축산학과 3개 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63년 3월 이리시에 있던 전북대 농과대학은 전주 덕진 캠퍼스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는 이리농림고등학교가 들어섰다.

    한편 1951년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설립추진위원회가 발족하고, 1952년 4월 이리 전북대 농과대학 자리에 기계, 전기, 제지(화공), 채광야금 4개 학과가 문을 열고 640명이 입학하면서 전북대 공대는 설립되었다.

    전북대 캠퍼스가 전주시 덕진동에 자리 잡으면서 1966년부터 이리공대 전주 이전은 본 대학과 공대 학생들의 숙원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이리공대를 전북대와 분리하겠다는 안을 갖고 있었고, 이에 공대 학생들은 격렬하게 반발하며 ‘공대 분리 결사반대’ 투쟁에 나섰다. 결국 공대 분리는 무산되었고 이리에 있던 전북대 공대는 1974년 전주로 이전이 확정되었다.

    정부는 전북대 공대가 이전하는 대신 국립 이리기계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이리의 채영철 국회의원은 공대 이전이 ‘섭섭하기는 하지만 몇 배 좋은 학교가 육성될 것이 확실하며, 공대를 전주로 떳떳하게 보내주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황인성 전북도지사는 ‘공대이전과 이리기계공업고등학교의 신설이 거도적 경사이며, 전북의 공업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공대를 그토록 아꼈던 이리시민들의 열망에 어긋나지 않도록 육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전북일보 1974. 3.1)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전경 사진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전경(1974년)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공과대학 이전 결사반대 시위 사진

    공과대학 이전 결사반대 시위(1968년)

  • 화강 최대교 검사
    일생과 강직,
    청빈한 삶

    최대교(崔大敎, 1901-1992)는 한국 현대사에서 청렴하고 강직한 대쪽검사의 표상으로 꼽히는 인물로, 한국 검찰은 2005년 그의 법조인생을 기려 최대교 검사상을 제정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용화산(미륵산) 서쪽에서 내려다보이는 넓은 평야였고, 13세까지 서당에 다니다가 15세때 금마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2㎞를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이후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와 일본 호세이(法政)대학을 거쳐 1932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며 1934년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였던 초임검사 시절 일본인 순사가 조선인 절도 피의자를 때려 숨지게 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총독부 경무국은 법무국을 통해 담당검사인 그에게 기소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인 순사에 대한 기소장과 자신의 사표를 동시에 검사정(檢事正)에게 올리고 출근하지 않은채 버텨 끝내 순사를 재판에 회부했다.

    화강 최대교 사진

    화강 최대교
    (崔大敎, 1901~1992)

    해방 이후에도 그는 사법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았다. 최대교는 정부수립 후인 1948년 12월 서울지검장으로 일하면서 반민특위 간부 암살음모사건, 판사 살해사건, 국회 프락치사건, 임영신 상공부 장관 독직사건, 백범 암살사건 등을 원칙과 법에 의해 엄정하게 처리하며 대쪽검사의 명성을 얻었다.

    그의 일생은 청렴과 강직으로 빛났는데 그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부인과 가족들이 봉투를 만들어 내다 팔았고 아들은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하기도 했다. 그는 또 도시락 대신 누룽지를 싸들고 다니며 점심을 해결하기도 했고, 한국전쟁기 부산 피난시절에는 고무신 좌우짝을 바꿔가며 신었고, 서울고검 검사장 시절에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관용차를 탈수 없다하여 집에서 걸어서 출근하고는 했다.

     
    1992년 최대교 타계 후 그의 일생을 담은 신문기사 사진

    1992년 최대교 타계 후 그의 일생을 담은 신문기사(동아일보 1992년 10월 21일 기사)

    동아일보

    불의 용납안한 ‘대쪽검사’ / 타계한 최대교 변호사 21일 91세로 타계한 최대교 변호사는 이러한 별명이 항상 붙어다닐 정도로 평소 청렴 강직한 법조인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 때문에 권력의 외풍에 흔들리는 검찰의 모습이 보일때마다 많은 법조인들은 최변호사와 같은 꿋꿋한 인물대망론을 펴왔다. (중략) ‘秋水之淸淸而柔 不如氷江不可舟’ 가을강은 맑으나 부드러워/배를 띄우지 못하는 얼음강과는 다르네. 국사학자 정인보 선생이 최변호사를 묘사한 이글처럼 깨끗하고 맑게 살아온 최변호사.(이하생략)

  • 유네스코 세계유산
    뿌리가 된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의 마한·백제사는 베일에 가려있었다. 금마와 왕궁지역에 흩어져 있는 심상치 않은 탑들과 절터는 천년의 세월을 흘러 역사 속에 사라져가고 있었다.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이 처음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이곳을 답사하면서 미륵사지를 확인하고 무너져가는 미륵사지 석탑에 시멘트 공사를 하여 임시로 복구해 두었다.

    1960년대 중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는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 수백년 동안 방치되었던 백제의 역사와 흔적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1965년 12월 6일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금빛 순금제 절첩판 «금강경»이 포함된 사리장치가 나왔다. 이 사리장치를 당시 신문에서는 ‘천년의 슬기’로 표현하며 그 아름다움과 가치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6년 미륵사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대 익산의 역사에 주목하며 익산의 백제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을 오늘날 고대 한국사의 한 페이지로 끌어올린 곳이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다.

    1973년 문을 연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김삼룡(金三龍, 1925-2014) 교수를 초대 소장으로 하여 연구소 설립 이후 미륵사지 동탑지와 왕궁리 성터에 대한 발굴조사 등을 진행하는 한편 마한백제의 역사를 국내외에 알리는 학술회의와 총서발간 등을 계속해왔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익산은 2004년 고도(古都)로 지정되었고, 2015년 미륵사지와 왕궁리 일대는 백제역사유적지구 8개 유적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전북대학교 공과대학 전경 사진

    미륵사지 동탑지 발굴조사 현장에
    참석한 박길진 총장(원광대)
    김삼룡 소장(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74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소장자료

    미륵사지 동탑지 발굴조사 현장 사진

    미륵사지 동탑지 발굴조사 현장(1974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소장자료

  • 1985년
    중공기
    불시착 사건

    1985년 8월 24일 오후 6시. 중공(中共)군의 경폭격기 일류신 28(IL-28)이 이리시 신흥동 제방 밑에 추락했다. 당시 중국은 한중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당시 적국으로서의 위치와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이 중공 폭격기는 우리 영공을 침범하자마자 초계중이던 우리 공군기가 포착하고, 군산비행장으로 유도하려 했으나 연료가 떨어져 항로를 이탈, 이같이 논바닥을 스치며 추락한 것이다.

    당시 국방부에서는 “중공기에 탑승했던 승무원 3명중 항법사는 숨지고, 조종사는 척추골절 등의 중상을 입어 원광대 부속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있으며, 통신사는 찰과상을 입었는데 신병을 확보, 보호중” 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생존한 통신사 유서의와 사망한 항법사 손무춘의 유해는 중공으로 송환하고, 제3국에 망명을 요청한 조종사 초천의는 대만으로 보냈다.

    이 중공기 불시착 사건으로 당시 논에서 농약을 뿌리고 있던 익산시 신흥동 신흥마을의 주민 한명이 사망하는 억울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전쟁 이후 적대적 관계에 놓였던 대한민국과 중국은 처음으로 대화의 길을 열었고, 이후 중국수교로 이어지는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중공군 경폭격기 불시착 현장 사진

    중공군 경폭격기 불시착 현장(1985년)

    전북일보

  • 1995년,
    이리시대(裡里時代)에서
    통합
    익산시대(益山時代)

    지금의 익산시는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된 도시다. 이리는 주현동 일대의 작은 리(里)단위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어 이리역과 함께 근대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이리시(도시)-익산군(농촌)의 형태로 굳어진 것은 해방 후 1947년이었다. 이때 이리읍은 익산군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이리부가 된다.

    그리고 47년의 세월이 흘러 이리-익산의 통합이 논의되면서 1994년 4월과 9월 주민투표가 실시되지만 익산군의 결사반대로 두 번 다 무산되고, 다음해인 1995년 3월 21일 3차 투표에 이르러서야 찬성 51.4%, 반대 48.6%로 통합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그해 5월 10일 드디어 통합 익산시가 출범했다. 통합의 조건은 ‘익산시’ 명칭 제정과 면지역 행정타운 건립, 함열지역 집중개발 등이었다. 통합 익산군은 32만명의 대도시가 되어 군산을 제치고 전북 제2의 도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익산의 역사 리스트
    1896년 전주부에서 익산군으로 분리
    (남일면, 남이면, 동일면, 서일면, 북일면)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익산군 18개 면과
    익산면 8개리 구성
    ✽이리(裡里)는 마동리, 동산리, 대장촌리 등과 함께 리 단위 구역으로 있음
    1917년 익산면이 지정면으로 지정(전국 23개중 하나)
    1931년 익산면이 익산읍으로 승격되었다가 이리읍으로 개칭
    ✽익산군은 이리읍 등 1읍 17면으로 구성
    1947년 익산군에서 이리읍이 분리되어 이리부로 승격
    (1949년 이리부는 이리시로 승격)
    1995년 익산군-이리시가 통합되어 다시 통합 익산시 출범
    이리-익산 통합기념 익산시청 전경 사진

    이리-익산 통합기념

    익산시 홍보담당관실 제공

    이리-익산 통합기념 신문기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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